성폭행했는데도 아빠 걱정… 친족성폭력, 지독한 그늘
수현(가명·21)씨는 충남의 특별지원보호시설에서 3년째 살고 있다. 이곳에 와서야 차가운 방에 혼자 남겨지지도, 나쁜 곳으로 끌려가지도 않았다.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다치거나 어긋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며 잔소리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자매고 엄마였다. 혈육은 오히려 형편없었다. 엄마는 사채에 시달리며 딸을 성매매에 동원하던 사람이었고, 4살 터울 언니는 고등학생 때 “엄마랑 같이 살기 싫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언니도 어린 동생 모르게 그런 일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듯 집을 나간 것이었다.
수현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로 성교육을 하러 온 강사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놨다. 엄마의 동거남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였다. 상황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경찰에 진술한 바로 다음 날 새벽 2시쯤 다른 지역에 있는 보호시설에 도착했다. 한겨울이었다. 시설 원장은 “입소 당시 (수현이 몸에) 여기저기 자해 흔적이 많았다. 성폭력 후유증으로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엄마와 동거남은 한 달여 뒤 각각 징역 2년, 5년을 받았다.
엄마 소식은 모른다. 이미 출소했을 테지만 그 겨울 이후 본 적도, 연락한 적도 없다. 그 시절 일은 이제 꺼내지 않는다. 가족 얘기도 피한다. 기자 앞에서 수현씨는 차분하면서도 조심스러워했다. 시설에 오기 전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짧게만 답했고 어떤 질문엔 침묵만 길게 늘어뜨렸다. 무거운 뚜껑을 애써 들어올리다 망설인 끝에 쿵 하고 내려놓고 말듯이. 엄마를 생각하는 일은 화가 나기보다는 아픈 것 같았다. 자꾸 눈물을 흘렸다.
“그때는 그냥 엄마가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수현씨는 말을 잇기 힘들어했다.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는 매일 아침 반찬만 만들어놓고 나갔다가 새벽에야 잠깐 들어왔다. 한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거의 못 봤을 정도였다. 엄마는 동거남에게 집과 생활비를 의존하고 있었다. 밤에는 몸을 팔고 낮에는 그의 공장에서 일했는데, 빌린 돈이 수천만원으로 불어난 뒤에는 월급을 달라고도 못했다.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 “딸을 섬에 팔아넘기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험상궂은 그 남자는 수현씨에게도 자기가 조폭이라며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라고 겁을 줬다. 몸엔 문신이 가득했다. 그는 90㎏에 달했다고 판결문에 적혀 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수현씨는 미성년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가냘팠다.
부모의 이혼, 엄마의 부재, 언니의 가출. 사방이 뻥 뚫린 돌봄 사각지대에서 어린 시절 수현씨가 기댄 건 책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매년 독서상을 받았다. 그것은 어쩌면 슬픈 일이었지만 유일하게 문을 열어주는 책은 수현이에게 유일한 해방구였다. 시설에 와서는 서재에 있는 책을 죄다 읽었다. 책장에 꽂힌 책은 족히 500권이 넘었다.
글쓰기를 좋아해 일기도 쓰고 시처럼 짧은 글도 썼다. 즐거운 일만 적었다. 맛있는 걸 먹었다거나 요리를 했다거나 재밌게 수다를 떨었다는 그런 내용들. 좋아하는 언니, 동생을 위해 생일 케이크도 만들었다. 평범한 일상은 수현씨에게 대단한 일이었다. 여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 중이다. “어렸을 때 가정폭력을 겪었다. 비슷한 아픔을 겪는 분들이나 한부모가정 아이들을 상담해주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지수(가명·26)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아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말 안 듣는다고 때릴 때도 있었지만 그런 일을 할 때만은 양해를 구하는 척했다. 엄마가 아프니까 네가 대신 그 역할을 해달라는 식이었다. 그는 딸이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몸에 손을 대고 있었다. 여느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그런 스킨십이 물론 아니었다. 아빠가 손을 댈 때면, 뭔가를 부탁할 때면 기분 나쁘고 아팠지만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 사랑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저는 그때 정말 사랑을 받고 싶었거든요. 제가 그걸 안 해주면 아빠는 사랑을 안 주니까….” 엄마는 ‘없는 사람’이었다. 장애가 있었는데 아파서 병원에 몇 년이나 입원하기도 했고 외출을 좋아하기도 해서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오빠도 친구들이랑 노느라 집에 잘 없었다. 아빠 말고는 관심을 주는 사람도, 아빠의 성폭행을 감시하거나 막을 사람도 없었다. 지수에게 집은 그렇게 외롭고 위험한 곳이었다.
잘못됐다는 걸 알고는 거부도 해봤지만 아빠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빠가 집안의 기둥인데 네가 어디 가서 이거 말하면 아빠는 감옥에 간다. 그럼 우리 가족 다 흩어져야 해.” 그렇게 겁을 줬다. 지수는 아빠 말처럼 다 무너질까 봐 무서웠다. 나만 힘들면 다 행복하니까 나만 입 닫으면 되지 뭐. 초등학생이 이렇게 생각하며 참았다.
마음은 병들어갔다. 대인기피증, 우울증 같은 게 생겼다. 고등학교 1학년이 돼서야 상담교사에게 털어놨다. 처음부터 신고하려던 건 아니었다. 학교폭력 피해로 상담 중이었는데 어쩌다 그 얘기까지 나와버렸다. 간신히 입을 떼고도 아빠가 감옥에는 안 갔으면 했다. 기둥인 아빠가 잡혀가면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 말이 떠올랐다. 상담교사는 “네가 원하면 덮을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얘기를 안 하면 이걸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설득하지 않았다면 지수는 더 오랫동안 성폭력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여태 덮고 살았을지 모른다.
아빠는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왜인지 불쌍하다는 마음이 마르지 않은 물기처럼 남아 있다. 이런 짓궂은 심리를 양가감정이라고 부른다. “참 성품은 좋았던 분인데, 그 일만 아니면 괜찮은데 안타깝죠. 그렇다고 벌은 안 받아야 되는 건 아니고요. 잘못은 잘못이니까.” 화가 나지 않으냐는 물음엔 “미운 감정은 들었다”고 답했다. 분노와 미움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가해자가 부모가 아니었다면 모순된 감정을 남에게 설명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빠가 잘해주면서 그걸 범죄에 이용했으니까. 이제는 그게 나쁜 걸 아는데….”

아빠는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그런 적 없다” “기억 안 난다”고 잡아뗐다. 부모 사랑에 목말라서 몹쓸 짓이라도 당한 딸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나중엔 형량이라도 줄이고 싶었는지 범행을 인정하고 감옥에 갔다. 몇 년형을 받았는지, 어느 교도소에 갇혔는지 지수씨는 듣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신고 직후 지수씨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으로 옮겨졌다가 입원했다. 명분은 극심한 우울증이었지만 그보다도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아빠는 가해자였고 엄마가 이제 와서 딸을 돌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외출도 면회도 안 되는 병동에서 반년을 지냈다. 답답하기보단 안심이 됐다. 거기선 험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다.
퇴원 후 경북의 특별지원보호시설에서 지내며 나쁜 기억을 몰아낼 수 있었다. “같이 공감해주고 이해해주고 그러다 보니까 거기서 에너지를 받았어요. 그게 제일 좋았던 거 같아요”라고 지수씨는 말했다. 적응 기간을 거쳐 고2로 진학했다. 많이 위축돼 있던 탓에 딱히 친구가 없었지만 왕따를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래도 트라우마는 마음속 어딘가에 계속 들러붙어 있었다. 언제든 다시 작동할 기회만 노리는 악성코드처럼. 뉴스에서 비슷한 사례를 접하면 힘든 기억이 다시 재생되고 우울감이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며 관심을 돌리려고 애썼다. 캘리그라피도 배웠다. 지금은 일하면서 연애에 자격증 공부까지 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대학 2학년 때까진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연애도 안 했는데 많이 달라졌다. 지수씨는 “트라우마는 죽을 때까지 따라오는 것 같다”며 “그래도 지금은 ‘나도 그랬지’ 하고 마는 정도”라고 말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지수씨는 보호시설에서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너희 잘못이 아니다. 너희 때문이 아니다’란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저도 모든 문제가 저 때문이라 생각해서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아서요.”
대검찰청이 발간한 ‘2021 범죄분석’ 보고서를 보면 2020년 기준 13세 미만 성폭력 범죄 피해자 894명 중 157명(17.6%)이 친족에 몹쓸 짓을 당했다. 5~6명 중 1명꼴이다. 이웃이나 지인(148명·16.6%)에게 당한 경우보다 많았다.
친족성폭력 가해자는 대부분 부친이다. 2019~2021년 특별지원보호시설협회 소속 전국 4개 시설에서 지낸 아동·청소년 123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친부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아이가 76명(61.8%)으로 가장 많았다. 새아빠나 엄마의 동거남에게 당한 사례(22명·17.9%)가 뒤를 이었다. 가해자 10명 중 8명이 아빠라는 얘기다.

아빠가 가해자일 때 유일하게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지만 대다수가 그 역할을 하지 않는다. 남편의 범행을 안 뒤에도 못 본 채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다. 돕는 엄마도 있다. 외부에 알려질 것 같으면 아이를 회유해 문제를 덮으려 한다. 아이를 비난하거나 협박하며 2차 가해를 하기도 한다.
경남 시설의 2020년 조사 결과 친족성폭력 가정에선 엄마가 지적장애 등 정신적 문제를 겪는 탓에 아이를 돌보지 못하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엄마가 생활력이 떨어지면 생계 걱정에 남편 편을 들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심정애 경기 지역 특별지원보호시설장은 “친족성폭력 가정에선 엄마가 경제력도, 삶에 대한 의지도 없어 아이가 성폭력을 당해도 아빠 편을 드는 경우가 많다”며 “(가해 가정으로부터의) 아동 분리 조치가 꼭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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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가족성폭력상담소 () 답변
수현(가명·21)씨는 충남의 특별지원보호시설에서 3년째 살고 있다. 이곳에 와서야 차가운 방에 혼자 남겨지지도, 나쁜 곳으로 끌려가지도 않았다.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 다치거나 어긋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며 잔소리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자매고 엄마였다. 혈육은 오히려 형편없었다. 엄마는 사채에 시달리며 딸을 성매매에 동원하던 사람이었고, 4살 터울 언니는 고등학생 때 “엄마랑 같이 살기 싫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언니도 어린 동생 모르게 그런 일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듯 집을 나간 것이었다.
수현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로 성교육을 하러 온 강사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털어놨다. 엄마의 동거남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였다. 상황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경찰에 진술한 바로 다음 날 새벽 2시쯤 다른 지역에 있는 보호시설에 도착했다. 한겨울이었다. 시설 원장은 “입소 당시 (수현이 몸에) 여기저기 자해 흔적이 많았다. 성폭력 후유증으로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엄마와 동거남은 한 달여 뒤 각각 징역 2년, 5년을 받았다.
엄마 소식은 모른다. 이미 출소했을 테지만 그 겨울 이후 본 적도, 연락한 적도 없다. 그 시절 일은 이제 꺼내지 않는다. 가족 얘기도 피한다. 기자 앞에서 수현씨는 차분하면서도 조심스러워했다. 시설에 오기 전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짧게만 답했고 어떤 질문엔 침묵만 길게 늘어뜨렸다. 무거운 뚜껑을 애써 들어올리다 망설인 끝에 쿵 하고 내려놓고 말듯이. 엄마를 생각하는 일은 화가 나기보다는 아픈 것 같았다. 자꾸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일상’이라는 대단한 일
“그때는 그냥 엄마가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 수현씨는 말을 잇기 힘들어했다.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는 매일 아침 반찬만 만들어놓고 나갔다가 새벽에야 잠깐 들어왔다. 한집에 살면서도 얼굴을 거의 못 봤을 정도였다. 엄마는 동거남에게 집과 생활비를 의존하고 있었다. 밤에는 몸을 팔고 낮에는 그의 공장에서 일했는데, 빌린 돈이 수천만원으로 불어난 뒤에는 월급을 달라고도 못했다. 시키는 일을 거부하면 “딸을 섬에 팔아넘기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험상궂은 그 남자는 수현씨에게도 자기가 조폭이라며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라고 겁을 줬다. 몸엔 문신이 가득했다. 그는 90㎏에 달했다고 판결문에 적혀 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수현씨는 미성년자라 해도 믿을 정도로 가냘팠다.
특별지원보호시설은 가족에게 성폭력을 당한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특화 쉼터다. 정부 지원 기관이지만 비밀리에 운영하는 곳이라 아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가족도 알 수 없다. 홈페이지도 없고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곳에선 모두가 비슷한 상처를 갖고 있는 탓에 남들에게 하기 힘든 가족 이야기를 조심스러우나마 그들끼리는 할 수 있다. 수현씨는 언니들 덕분에 적응이 빨랐다고 한다. 그렇게 좋아하던 책을 이곳에선 마음껏 읽을 수 있었다.
부모의 이혼, 엄마의 부재, 언니의 가출. 사방이 뻥 뚫린 돌봄 사각지대에서 어린 시절 수현씨가 기댄 건 책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매년 독서상을 받았다. 그것은 어쩌면 슬픈 일이었지만 유일하게 문을 열어주는 책은 수현이에게 유일한 해방구였다. 시설에 와서는 서재에 있는 책을 죄다 읽었다. 책장에 꽂힌 책은 족히 500권이 넘었다.
글쓰기를 좋아해 일기도 쓰고 시처럼 짧은 글도 썼다. 즐거운 일만 적었다. 맛있는 걸 먹었다거나 요리를 했다거나 재밌게 수다를 떨었다는 그런 내용들. 좋아하는 언니, 동생을 위해 생일 케이크도 만들었다. 평범한 일상은 수현씨에게 대단한 일이었다. 여기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 중이다. “어렸을 때 가정폭력을 겪었다. 비슷한 아픔을 겪는 분들이나 한부모가정 아이들을 상담해주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나만 힘들면 다 행복하니까
지수(가명·26)씨는 초등학생 때부터 아빠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말 안 듣는다고 때릴 때도 있었지만 그런 일을 할 때만은 양해를 구하는 척했다. 엄마가 아프니까 네가 대신 그 역할을 해달라는 식이었다. 그는 딸이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몸에 손을 대고 있었다. 여느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그런 스킨십이 물론 아니었다. 아빠가 손을 댈 때면, 뭔가를 부탁할 때면 기분 나쁘고 아팠지만 원래 그런 건 줄 알았다. 사랑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저는 그때 정말 사랑을 받고 싶었거든요. 제가 그걸 안 해주면 아빠는 사랑을 안 주니까….” 엄마는 ‘없는 사람’이었다. 장애가 있었는데 아파서 병원에 몇 년이나 입원하기도 했고 외출을 좋아하기도 해서 집을 비울 때가 많았다.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오빠도 친구들이랑 노느라 집에 잘 없었다. 아빠 말고는 관심을 주는 사람도, 아빠의 성폭행을 감시하거나 막을 사람도 없었다. 지수에게 집은 그렇게 외롭고 위험한 곳이었다.
잘못됐다는 걸 알고는 거부도 해봤지만 아빠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빠가 집안의 기둥인데 네가 어디 가서 이거 말하면 아빠는 감옥에 간다. 그럼 우리 가족 다 흩어져야 해.” 그렇게 겁을 줬다. 지수는 아빠 말처럼 다 무너질까 봐 무서웠다. 나만 힘들면 다 행복하니까 나만 입 닫으면 되지 뭐. 초등학생이 이렇게 생각하며 참았다.
마음은 병들어갔다. 대인기피증, 우울증 같은 게 생겼다. 고등학교 1학년이 돼서야 상담교사에게 털어놨다. 처음부터 신고하려던 건 아니었다. 학교폭력 피해로 상담 중이었는데 어쩌다 그 얘기까지 나와버렸다. 간신히 입을 떼고도 아빠가 감옥에는 안 갔으면 했다. 기둥인 아빠가 잡혀가면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 말이 떠올랐다. 상담교사는 “네가 원하면 덮을 수 있다. 하지만 네가 얘기를 안 하면 이걸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설득하지 않았다면 지수는 더 오랫동안 성폭력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여태 덮고 살았을지 모른다.
유일한 속죄가 있다면
아빠는 나쁜 사람이다. 그런데 왜인지 불쌍하다는 마음이 마르지 않은 물기처럼 남아 있다. 이런 짓궂은 심리를 양가감정이라고 부른다. “참 성품은 좋았던 분인데, 그 일만 아니면 괜찮은데 안타깝죠. 그렇다고 벌은 안 받아야 되는 건 아니고요. 잘못은 잘못이니까.” 화가 나지 않으냐는 물음엔 “미운 감정은 들었다”고 답했다. 분노와 미움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가해자가 부모가 아니었다면 모순된 감정을 남에게 설명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아빠가 잘해주면서 그걸 범죄에 이용했으니까. 이제는 그게 나쁜 걸 아는데….”
아빠는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그런 적 없다” “기억 안 난다”고 잡아뗐다. 부모 사랑에 목말라서 몹쓸 짓이라도 당한 딸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 나중엔 형량이라도 줄이고 싶었는지 범행을 인정하고 감옥에 갔다. 몇 년형을 받았는지, 어느 교도소에 갇혔는지 지수씨는 듣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모른다.
신고 직후 지수씨는 성폭력 피해자 지원기관으로 옮겨졌다가 입원했다. 명분은 극심한 우울증이었지만 그보다도 가족으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아빠는 가해자였고 엄마가 이제 와서 딸을 돌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외출도 면회도 안 되는 병동에서 반년을 지냈다. 답답하기보단 안심이 됐다. 거기선 험한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됐다.
퇴원 후 경북의 특별지원보호시설에서 지내며 나쁜 기억을 몰아낼 수 있었다. “같이 공감해주고 이해해주고 그러다 보니까 거기서 에너지를 받았어요. 그게 제일 좋았던 거 같아요”라고 지수씨는 말했다. 적응 기간을 거쳐 고2로 진학했다. 많이 위축돼 있던 탓에 딱히 친구가 없었지만 왕따를 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래도 트라우마는 마음속 어딘가에 계속 들러붙어 있었다. 언제든 다시 작동할 기회만 노리는 악성코드처럼. 뉴스에서 비슷한 사례를 접하면 힘든 기억이 다시 재생되고 우울감이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거나 친구와 수다를 떨며 관심을 돌리려고 애썼다. 캘리그라피도 배웠다. 지금은 일하면서 연애에 자격증 공부까지 하느라 바쁘다고 한다. 대학 2학년 때까진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커서 연애도 안 했는데 많이 달라졌다. 지수씨는 “트라우마는 죽을 때까지 따라오는 것 같다”며 “그래도 지금은 ‘나도 그랬지’ 하고 마는 정도”라고 말했다.
아빠를 용서할 마음은 없다. 굳이 보고 싶지도 않다고 지수씨는 딱 잘라 말했다. 이제 그는 과거의 가족으로부터 해방돼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한때 부모였던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가 있다면 피해자인 자식 인생에서 깨끗이 사라져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었다. 그런 사람,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지수씨는 보호시설에서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너희 잘못이 아니다. 너희 때문이 아니다’란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저도 모든 문제가 저 때문이라 생각해서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아서요.”